신일고등학교 야구부
1. 개요
여타 명문 야구부들에 비해 역사는 다소 짧은 신흥 명문 축에 들어가는 학교지만, 1990년대 최강의 시절을 두 차례 만들면서 한 시대를 지배한 강호.
또한 2018년 기준으로 봉중근, 김현수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으며[4] 광주일고에 이어 메이저리거를 2번째로 많이 배출한 학교다.[5]
2. 연혁
2.1. 창단과 동시에 우승하다
1975년 한동화를 초대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팀을 창단했다. 신일고의 전력은 일반적인 창단 팀과 달리 초반부터 강했는데, 창단 당시에 일찌감치 영입한 박종훈에 광주 동신고 야구부가 해체하자 그 멤버를 흡수했고[6] , 여기에 김정수, 양승호같은 멤버를 보강하면서 전력을 구축, 1976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창단 1년 만에 전국 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그리고 1976년 스카웃한 1학년 멤버들이 3학년이 되는 1978년에 다시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면서 창단 3년 안에 두 번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이 우승을 두 번이나 하면서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교야구 판도에 신흥 강호로 떠오르고 인기몰이를 하면서, 신일고에는 꾸준히 우수한 선수들이 수급되었다. 비록 이 우수한 선수들은 1980년대 초반에는 팀의 4강 진출까지는 이끌었어도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기어이 1987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무엇보다 신일고 재단은 확실한 한 방을 보여준 야구부에 더 강한 매력을 느꼈는지, 1981년 농구부를 해체하고[7] , 재단의 지원을 몰아 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실은 1990년대 두 차례 전성기로 보답이 되었다.
2.2. 첫 전성기
1991년 신일고의 선수진은 환상적이었다. 전설의 92학번 투수 중에서도 적어도 고교와 대학 시절 명성은 박찬호를 능가했던 조성민, 대학 시절에 입은 불의의 화상으로 프로 무대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못 남겼지만 고교 시절 팀의 리더로 투타 모두 뛰어났던 설종진, 2학년으로 설명이 필요없는 아마 최고의 강타자 강혁, 여기에 훌륭한 내야수였던 백재호, 1학년 김재현과 조인성까지, 극강으로 구축되었던 신일고의 황금세대는 1991년 고교야구를 평정했다.
그들과 지긋지긋한 악연이 있는 대통령배에서는 당시 돌풍을 일으키면서 2관왕을 차지한 경남상고에 밀려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봉황대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황금사자기에서 마저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들도 2관왕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 황금세대의 막내였던 김재현이 3학년이던 1993년 다시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면서 이 황금세대는 총 세 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그들마저 능가하는 대단한 후배들이 등장한다.
2.3. 두 번째 전성기
시작은 1996년 황금사자기 우승이었다. 당시 우승의 주역들은 2학년이었다. 팀의 4번 타자로 홈런상을 탄 안치용이 대표적인 주역. 여기에 군기반장 겸 팀의 주장이었던 포수 현재윤도 당시 2학년이었다. 그리고 1997년, 1학년 선수들이 성장한 때, 신일고의 위력은 배가되었다. 그 중 가장 중심이었던 선수가 투수로서는 팀의 좌완 에이스였고, 타자로서는 괴력을 뿜어낸 봉중근이었다. 봉중근 외에도 김광삼, 한상훈같은 선수들이 이 때 세대인데 우승 경험이 있던 2학년에 괴물이 더해진 신일고는 정말 막강했다.
마침 초대 창단 감독인 한동화 감독이 신일고로 컴백했고, 그가 불러온 프로 선수들의 레슨 속에서 강해진 신일고 선수들은 비록 그들이 징그럽게 약했던 대통령배에서는 역시 막강한 내야라인을 구축한 광주일고에 패했지만, 청룡기부터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청룡기 우승, 봉황대기 우승, 그리고 황금사자기 우승[* 7-7 동점 상황에서 9회말 김광삼의 끝내기안타에 힘업어 우승을 차지했다.관련기사] 까지 3관왕을 차지하면서 한 시대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마지막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광주일고를 제압한 것이 그들의 시대를 알리는 백미 중의 백미. 이 황금 시대는 2학년이던 봉중근이 더 강해지면서 1998년에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1997년 봉중근이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 MVP를 차지하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고교 무대를 떠나면서 그렇게 끝이 났다.안치용의 회고
2.4. 전성기 이후
1990년대 두 차례의 전성기 이후 신일고는 그 화려했던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한 강팀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3년 장호연 감독의 지도 아래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과거의 명성을 입증했고, 2009년 청룡기에서는 박주환의 호투 속에 북일고를 누르고 우승하면서 팀 창단 후 두 번째 청룡기를 차지했다. 2010년 자율형사립고에 지정된 후 직속 팜이었던 신일중학교 야구부가 해체되는 등 선수 수급이 예전에 비해서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강팀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가장 아쉬웠던 해는 2012년으로 이윤학을 앞세워 대통령배와 청룡기 모두 결승에 올랐지만, 두 번 모두 결승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5년 동안에는 한 번도 준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침체기를 보냈다. 이러한 성적 부진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교가 자율형사립고로 전환된 이후 선수육성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 힘들어져 선수단의 인원을 축소했기 때문이라는게 중론이다. 배재고나 중앙고처럼 곧바로 투자를 줄인 게 아니라 서서히 지원이 줄다 보니 뒤늦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뿐. 과거에는 유망주들을 장학금으로 대거 데려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본교 이외의 다른 학교들도 장학금 등 많은 혜택으로 유망주들을 데려가려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강한 선수단을 꾸리기가 빠듯해진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다가 2018년에는 황금사자기 16강, 청룡기 8강으로 조금씩 올라오더니 대통령배와 협회장기에서 모처럼 전국대회 4강에 올랐다.
2019년 7월 9일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신일고의 자율형 사립고 지정 취소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일부에서는 다시 예전처럼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지는 미지수다. 2019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8강에 올랐다.
2020년. 7년만에 주말리그 전승 우승을 이뤄냈다. 더불어 유일한 무패행진(10연승)을 기록하던 신일고는 2020년 청룡기 8강에서 충북 지역의 강호 세광고등학교한테 1:8 7회 콜드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이어진 대통령배에서는 북일고, 동산고, 장안고, 상원고를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해 강릉고와 격돌한다. 신일고와 강릉고 모두 대통령배 첫 우승 도전이다.[9] 아쉽게도 결승에서 2-7로 패하면서 대통령배 한을 이번에도 풀지 못했다. 두차례의 전성기 이후 가장 우승권에 접한 전력이었지만 주말리그 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1, 2학년이 출전한 봉황대기에서는 충암고등학교에게 7:0으로 패하며 2020년을 마감하였다.
3. 기타
- [image]
신일고 3대 X신이라는 사진이 넷상에서 유명하다. 왼쪽부터 차례로 이형진[10] , 임한용, 모상기. 남윤성이라고 알려진 사진은 본인의 다른 사진들과 대조만 해봐도 전혀 다른 사람인걸 알수 있으나 실제 인물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로 잘못 알려져 있다.
- 부산행에 등장한 가상의 야구부인 신연고등학교 야구부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서울의 고등학교들 중 교명에 신이 들어가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는 신일고가 유일한데다가 유니폼을 보면 모자의 엠블럼 또한 동일하다.
4. 출신선수[12]
[1] 본교 출신으로 2017년 10월부터 감독으로 있다. 강혁, 백재호와 동기.[2] 4대 메이저 + 협회장기[3]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4]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보지 못하긴 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뛴 이대은도 있다.[5] 그외 학교로는 부산고등학교가 추신수(2000년 시애틀 입단), 차승 백(1998년 샌디에이고 입단)을 배출했고, 경기고등학교는 오승환(2016년 세인트루이스 입단)과 황재균(2017년 샌프란시스코 입단)을 배출해 냈고,동산고등학교는 류현진(2013년 LA 다저스 입단)과 최지만(2009년 시애틀 입단)을 배출해 냈다.[6] 이 때 옮겨 온 대표적인 선수가 뒤애 해태-KIA의 스카우트 및 스카우트 팀장을 지내는 김경훈이다.[7] 신일고등학교 농구부는 2000년대 초반에 재창단해 주태수를 배출하기도 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해체되었다.[8] 현재 신일고 별관 복도에 걸려있는 사진이 바로 이것[9] 신일고는 전국대회 12회 우승을 했지만 대통령배만 차지하지 못했다. 강릉고는 2019년 청룡기 준우승, 봉황대기 준우승, 2020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차지했다.[10] 프로로 데뷔하지 못했다.[11] 바로 위에 성신여자대학교 미아운정그린캠퍼스가 있다.[12]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13] OB 베어스에서 지명했으나, 지명권 양도로 데뷔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했다.[14] 신일고 수석코치를 거쳐 2016년~2017년에 감독을 맡았다.[15] 지명은 받았지만 경희대학교로 진학하면서 데뷔는 2003년에 했다.[16] 2005년 시즌 종료 후 강간죄가 적발되어 임의탈퇴.[17] 본래 2001년 현대 유니콘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후 현대가 지명을 포기하면서 홍익대학교로 진학했다.[18] 원래는 한서고에 진학했다가 2학년 때 신일고로 전학했다.[19] 임경완의 FA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롯데로 갔다가 다시 정대현의 FA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SK로 복귀했다.[20] 최동현에서 개명했다.